설교의 의무: 요한복음 16:25-33
설교제목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설교자: 허창수 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닷새 전의 주일이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고난이 있음을 분명히 아셨지만 무리에 둘러싸여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12:13).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불렀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불렸습니다.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지만 공생애 3년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3분의 1 이상이 종려주일 마지막 주에 집중적으로 기록됩니다.
예수님의 삶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 가장 좋은 날입니다.
이번 주는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주간입니다.
예수께서 생애 말년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나귀 새끼를 타고 군중들로부터 호산나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앞에 십자가를 보셨습니다.
십자가 전날 밤 열두 제자와 함께 유월절을 지키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후 그들에게 귀중한 성서의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13-16장에는 유언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 33분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끌려가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막연하게 두렵지도 않습니다.
그의 고통과 죽음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내가 세상을 정복했다”. 그것은 놀라운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훌륭한 발언을 하셨습니다.
역경이 계속되고, 환난이 있고, 고난이 있고,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승리를 선언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자신의 공생애를 조직하십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식과 함께 그의 죽음의 소식을 전한 것은 그의 죽음이 제자들을 절망에 빠뜨리지 않고 큰 기쁨과 소망을 가져다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너희가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무덤에 있는 3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너희가 곧 나를 보리라”는 말은 죽은 후 무덤에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서 다시 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시 물어보고 싶어 “조금 있으면서 말씀하셨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씀인지 우리는 모릅니다”(18)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모릅니다.
교회에서도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듣고 배운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과 묻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오늘날 우리가 이 진리를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끌려가시는 것을 보고 모두 도망하며 두려워하며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21절에 보면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을 기쁨에 비유하여 이르시되 여자가 해산하면 때가 이르므로 근심하나 해산하면 기쁨을 인하여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나니 세상에 태어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원리를 설명하시려고 여자의 해산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 임박한 출산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가 순간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기쁨으로 바뀌듯이 제자들의 슬픔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부활 때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면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잠시 동안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기쁨이 너무 커서 아무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당신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는 그런 기쁨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원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에게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한 어머니에게서 난 아이로 온 가족이 기쁨을 누리듯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제자들도 잠시 후에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관계 회복을 선포하셨고,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뿐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28).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성육신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또한 죽음과 부활과 아버지께로의 승천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오셨다가 그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 복잡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예수님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그가 오고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그것을 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상상합니다.
대제사장들의 거짓 재판이나 빌라도의 사형 선고는 별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갈보리의 비난과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과 괴로움이 떠올랐지만 나는 거기에서 마음을 떼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모든 어려움이 세상에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목적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노라”(30)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도 “이제야 믿느냐”(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흩어지고 각각 자기 처소로 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더라도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달려갔으나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오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에 담대히 십자가를 맞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도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요 8:16)라고 말하는 등대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며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을 인하여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그래서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갈 때에도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혼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내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그는 세상을 정복했다고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곧 포로로 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세상을 이겼다”고 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기신 세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환난과 박해를 의미합니다.
불의와 거짓말의 세상은 예수님 자신을 괴롭힙니다.
제자들도 다 흩어졌다고 하니 제자들도 다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배신이 있고 배신의 아픔이 세상이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입니다.
세상은 “죄”를 의미합니다.
“죄”는 지옥에서의 멸망과 영원한 형벌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대통령이 자신의 범죄로 체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통령은 누구인가 모두가 대통령을 경배하고 존경하며 따른다.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은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명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비판의 소리가 들렸다.
죄는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존재라도 죄로 인해 무능한 존재가 됩니다.
아담 이후 인류는 죄 때문에 사탄 마귀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습니다.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영원한 저주를 받을 운명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보시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의 구원을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저주가 아닙니다.
죄인의 죄값을 치르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죄인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죽음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한 번, 요한일서에 여섯 번, 요한계시록에 열일곱 번 나옵니다.
“내가 이겼어.” 그가 Sieg에게 말했다.
승리가 뭐야 여수가 말하는 승리는 망각이 아니다.
비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승리는 마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 우주적 사건입니다.
이것은 승리입니다.
승리는 생명입니다.
이건 중요하다.
영생입니다.
승리는 삶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영광입니다.
이기는 것은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는 것이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은 승리가 아닙니다.
이겼지만 두렵다면 그것은 승리가 아니다.
지위를 가지지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얻는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이고 정당한 승리입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승리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평화입니다.
평화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함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승리요 내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립니다.
주님의 평안의 축복을 받은 후에 우리는 환난 중에도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소서.